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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the life

개발자 이전의 삶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선호하지 않는 말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당시에는 개발자라는 직업을 삶에서 염두 해두지 않고 있었다. 초등학교때 당시 유행했던 플래시 액션스크립트에 한때 푹 빠져 있었지만, 플래시가 점점 시대의 뒷편으로 사라지면서 나 역시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대신 소설들과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항상 내 가방 안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이나 서점에서 사온 책 한권이 하나씩은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특별한 일이 없거나, 혹은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영화를 봤다. 그 두가지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정의했다. 작가들의 살아숨쉬는 필체로 쓰여진 문장속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고, 감독들이 카메라로 비추는 세상의 시각속에서 나의 자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나의 진로는 자연스럽게 ‘작가’로 정하게 되었다. 작가를 지망했던 데에는 내가 썼던 글들이 인터넷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었던 영향이 컸다. 당시 나는 영화 평론가들의 글에 영감을 받아 ‘나도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글을 써봐야 겠다!’ 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반응이 궁금해서 영화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은 피드백들이 댓글로 달렸고, 심지어 글이 한동안 안올라오던 시기에는 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요청까지 받게 되었다. ‘주토피아’를 보고 감명을 받아 썼던 글이 네이버 상단에 올라가기까지 하면서 내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수 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글쓰기’라는 행위에 순수한 재미를 느꼈고, ‘글’ 이라는 매체를 진실로 사랑했었다. 그래서 작가로써의 진로에는 큰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적인 문제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작가라는 진로에 대해 괴롭히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수능 성적’ 이였다. 솔직하게 나쁘진 않았는데, 내가 지망하던 문예창작과에 넣기에는 모자란 점수였다. 두번째로 현실적인 직업적 문제였다. ‘그래서 어디로 취업할건데?’ 라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웠다. 확실하지 않은 신춘문예에 등단하기? 혹은 잘되봐야 신문사에서 기자로 글을 기고하는 것인데, 내가 작가로써 꿈꾸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미래였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현실과 타협을 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였던 것 같다. 대학 지원서를 넣던 와중 문득 어릴때 잠깐 코딩을 했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 나는 현재의 글 못지 않게 코딩에 푹 빠져있었고, 내가 올렸었던 조악한 플래시 게임이 좋은 반응을 얻었었던 것 까지 생각이 났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글’과 ‘코딩’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행위 자체를 정말 좋아했었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남길 수 있었다.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내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동등하게 실현 할 수 있었다. 단지 내가 한동안 잊고 있었을 뿐이였다. 그래서 무작정 컴퓨터 공학과에 지원서를 넣었고, 덜컥 합격해버렸다.

개발자라는 직업, 그리고 삶의 가치

’코딩’은 예상치 못하게도 정말 재밌었다. 처음 1학년에 들어가서 Python을 배웠을때 이 언어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었다. 엑셀도 조작할 수 있고, 게임도 만들 수 있고, 당시에 유행했던 AI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몇시간동안 매달려서 화면에 결과물이 출력되면 그만큼 기쁜것이 없었고, 남들이 괴로워하던 전공 공부가 오히려 나에겐 재미로 다가왔다. 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개발자’라는 직업에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과 ‘코딩’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분야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때부터 많은 작가들, 감독들, 그리고 프로그램들을 동경해오면서 “나도 저 사람들 만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지금도 크게 모토는 바뀌지 않았다. 내가 개발하는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미쳤으면 좋겠고, 내가 쓰는 글들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영감을 받고 간다면 그것 만큼 창작자로서 행복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체성은 늘 줄곧 ‘창작자’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만드는 행위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받고, 고쳐나가고,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 해내는 것이 기쁘다. 그래서 글쓰는 행위와 코딩은 멈출 수가 없다. 나의 삶의 궤적은 앞으로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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